<꽃을 노래하는 시 모음> 정연복의 '꽃 앞에 서면' 외 + 꽃 앞에 서면 나는 꽃보다 수백 배는 더 큽니다 하지만 나는 꽃보다 작습니다 나는 꽃보다 비할 데 없이 무겁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꽃보다 가볍습니다. 요즘 들어 나는 그렇습니다 꽃 앞에 서면 아무 꽃 앞에만 서면 꽃은 나보다 커 보이고 왠지 나는 꽃보다 작아집니다 말없이 피고 지고 또 피는 꽃 앞에 서면. + 꽃잎 묵상 꽃잎이 실바람에 흔들립니다 참 연약해 보입니다 꽃잎이 말없이 집니다 참 의연해 보입니다. 약하기로는 나는 꽃잎과 똑같습니다 세상살이 작은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강하기로도 나는 꽃잎과 똑같을까요 지상에서 떠나는 날 꽃의 모습 닮을 수 있을까요. 요즘 점점 더 꽃의 존재가 커 보입니다. + 저 꽃 밝음뿐이었다면 저 꽃은 없었으리 땅속 어둠에서 저 꽃은 잉태되었으리. 햇살뿐이었다면 저 꽃의 빛깔은 없었으리 쓸쓸한 달빛 더불어 저 눈부신 빛깔은 생겨났으리. 좋은 날뿐이었다면 저 꽃의 향기는 없었으리 비바람 맞고 찬이슬 젖으며 저 그윽한 향기는 자라났으리. 어쩌면 사람보다 더 많이 갖은 고통과 시련 겪고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가만히 웃고 있는 말없는 영웅 같은 저 꽃! + 꽃이 살아가는 법 꽃은 다른 꽃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에만 집중하고 자기 삶에 충실할 뿐 다른 꽃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자신의 모양과 빛깔과 향기로 살아가면 그뿐 다른 꽃들을 닮으려 하지도 시샘도 무시도 않는다 이름 있는 꽃도 이름 모를 들꽃도 자기를 남과 비교하지 않고 저마다의 존재로 당당하다 잘난 체도 않고 못났다고 기죽는 일도 없이 꽃은 어떤 꽃이라도 제각기 최상급으로 아름답다 꽃은 참된 인생살이의 살아 있는 모범이요 선생이다. + 꽃잎의 행간(行間) 작은 꽃잎 하나 지는 모습에 이슬같이 맑은 눈물 한 방울 남몰래 흘려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인생살이를 모르는 것. 한철 눈부시게 피었다 쓸쓸히 지는 꽃잎 하나의 그 짧은 행간에 덧없고도 깊고 아름다운 삶과 죽음의 진실이 담겨 있으니. + 꽃 이야기 꽃이 덧없이 피고 진다고 말하지 말자 꽃은 사람보다 오래 산다 피고 지고 또 다시 핀다 까마득한 옛날에도 꽃은 이 세상에 있었을 테고 아득히 먼 미래에도 꽃은 이 땅에 피어날 것이다. 꽃의 몸은 실낱같이 여리다 사람의 손길만 닿아도 생기를 잃고 오그라든다 바람 한줄기에도 쉬이 흔들린다. 하지만 꽃의 영혼은 강하다 남들이 알아주는 이름이야 없든 말든 잘나도 잘난 체하지 않고 못나도 기죽지 않으며 요란 떨지 않고 한마디 말도 없이 함성도 없이 저만의 빛깔과 모양과 향기로 세상 풍경을 바꿔놓는다 제 할 일 묵묵히 다하며 뜻 있는 한 생(生)을 완성한다. + 꽃에 대한 결례 주일날 이른 아침 교회 화단에 연보랏빛 나팔꽃 활짝 피어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빛이 고울 수 있을까.' 그 모습 너무 예뻐 사진에 담으려고 사진을 좀더 예쁘게 찍어 보려고 살며시 만졌더니 꽃이 스르르 오므라들었다. 그래, 꽃을 건드리는 게 아니었어 그것 그대로 꽃의 참된 모습인 것을 내 손으로 슬쩍 건드리는 게 아니었어. + 꽃 예배당 한 송이 꽃은 한 채의 예배당 대문도 없이 가장 작으면서도 무척 성스러운 예배당 십일조나 건축헌금 이런저런 명목의 헌금을 걷지 없으니 땡전 한푼 없는 사람들도 전혀 기죽을 일이 없다 딱 정해진 예배 시간도 없어 길을 가다 그냥 기웃거려도 되고 잠시 그 앞에 서서 마음의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 복잡한 기도문을 외울 필요가 없으니 배움이 부족해도 괜찮고 경전이나 교리 따위도 없으니 까막눈이라도 상관없다. 이런 게 무슨 예배당이냐고 손사래치고 심지어 화낼 사람들도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 이 활짝 트인 예배당에서는 졸음에 겹던 눈 번쩍 뜨이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며 상쾌하며 영혼은 어린애같이 순수해진다 길고 장황한 설교가 없으니 하품 나오는 일도 없고 웅장한 찬송도 성가대도 없으니 조용히 묵상하기에 딱 좋다 인종이나 국적, 성별이나 나이를 따지지 않고 섣불리 믿음을 검증하려 들지도 않고 속 좁은 배타주의 같은 것도 없는 만인의 열린 예배당이다. 온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참 좋은 예배당! * 정연복(鄭然福) : 1957년 서울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