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새 양복으로 갈아입고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옷에 얼룩이 묻어 있다
즐거운 식사시간에도
국물은 떨어져
무릎에 얼룩을 남긴다
아내가 새로 깐 식탁보에도
내 몸의 흉터자국처럼
얼룩이 남는다
사람들과 말을 할 때에도
말들이 흙탕물로 튀어
마음의 얼룩으로 남는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룩을 남겼을까
길거리에서
만원버스에서
무심코 내가 떨어뜨린 콧물처럼 남겼을 얼룩들
꽃에 사뿐히 앉았다 날아간
나비처럼
얼룩을 안 남길 수는 진정 없는 것일까
(이준관·시인, 1949-)
+ 고요한 물
고요한 물이라야 고요한 얼굴이 비추인다
흐르는 물에는 흐르는 모습만이 보인다
굽이치는 물줄기에는 굽이치는 마음이 나타난다
당신도 가끔은 고요한 얼굴을 만나는가
고요한 물 앞에 멈추어 가끔은 깊어지는가
(도종환·시인, 1954-)
+ 정자나무가 되어
모두가 내 그늘에서 쉬어가길 바랐다
머리 희끗해진 겨울산에서
발밑을 바라보니
오히려 내가
누군가의 등을 딛고 서있었다.
(전숙·시인, 1955-)
+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한가
옅은 하늘빛 옥빛 바다의 몸을 내 눈길이 쓰다듬는데
어떻게 내 몸에서 작은 물결이 더 작은 물결을 깨우는가
어째서 아주 오래 살았는데 자꾸만 유치해지는가
펑퍼짐한 마당바위처럼 꿈쩍 않는 바다를 보며
나는 자꾸 욕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무엇이 이렇게 내 안에서 캄캄해만 가는가
(이성복·시인, 1952-)
+ 아무래도 나는
누구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이렇듯
나 자신만을 챙겼음을
다시 알았을 때 나는 참 외롭다.
많은 이유로
아프고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 곁을
몸으로 뿐 아니라
마음으로 비켜가는
나 자신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참 부끄럽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정신병원 풍경
정신병원이 있는
그 곁에
이사가고 싶다.
조용한
한 폭의 그림.
그
병원을 바라보면서
나는 언제나
나를
더욱 나를
생각해보고 싶다.
(박봉우·시인, 1934-1990)
+ 나에게 나를 묻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강을 건너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악어 소굴로
뛰어드는 누우입니다
그대여 사랑을 아는가
나만을 사랑하려
철옹성을 구축하여
다가오는 사랑에
화살을 퍼붓는 겁보입니다
그대여 길을 가는가
까마득한 숲에서
언제나 같은 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헤매고 있는 바람입니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어서 가보게
그대의 가슴으로
(공석진·시인, 1960-)
+ 오늘은 내가 나의 손님이고 싶다
그대가 귀찮고 싫어서가 아닙니다
이따금 혼자가 좋을 때가 있습니다
모처럼 내가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서라도 종종
내가 나를 찾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나는 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잘 살고 있는지
잘못 살고 있는지
스스로 안부가 궁금해서라도
홀로가 좋을 때 있나니
나는 늘 나의 손님이고 싶습니다
(김학수·시인)
+ 나는 누구?
도서관은 골 깊은 산이다.
등산하듯 층계를 올라
어두운 서가를 뒤진다.
이 골짜기는 역사 서가, 저 산봉우리는 철학서가,
저 능선은 과학 서가
고서는 이끼 낀 바위로 앉아 있고
사서는 칡넝쿨로 얽혀 있다.
이곳 저곳 걸으며
화두 하나 참구한다.
나는 누구일까
청노루, 백사슴 다 아는 산길에서
길을 잃고 망연히 헤매는데
앞에는 문득
깎아지른 듯 가로막고 서 있는 절벽.
그 까마득한 벼랑에 핀
꽃
한 그루.
(오세영·시인, 1942-)